현 세계 챔피언 현 동양 챔피언 현 한국 챔피언 역대 세계 챔피언 역대 동양 챔피언 역대 한국 챔피언 세계타이틀 전사
역대 세계 챔피언
전 주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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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 BOXNG WORLD CHAMPION HISTORY\"
“세계 챔피언”은 실력만으로 될수 없다 라는 복싱계 속설이 있다. 어떤 이는 한술 더 떠 “운칠기삼” 이라는 말로 세계 챔피언을 표현 하기도 한다.
어느 정도 수긍이 가는 말이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실력이 없으면 운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1965년 12월 서강일 선수가 세계 도전의 첫 신호탄을 쏘아 올린 이래, 한국복싱은 지금까지 43명의(WBA, WBA, IBF 타이틀수 51개) 세계챔피언을 탄생 시켰다. 이중에는 잠시 스쳐 지나가는 인물도 있지만 복싱팬들의 마음속에 영원히 기억되는 영웅들도 있다.
한국복싱 70여년의 역사중 영광과 좌절이 교차한 43개의 성상들을 REMIND 해본다.



제12편 Joo-Do, Jeon
IBF Jr. Bantamweight Champion
“투지만점의 한국형 탱크”  

전 주 도
출 생 1964년 1월 25일 / 정선
신 장  168cm
통산전적  27전 20승(11KO) 3무 4패 <1981.5.8 ~ 1989.12.30>
소 속   극 동
매니저  전호연
스타일  라이트 파이터
타이틀  KBC Jr.밴텀급 (1983), IBF Jr.밴텀급 (1983) / 5차방어


** About IBF(국제복싱연맹) **
오늘날 프로 복싱에서 명실상부한 세계 챔피언으로 대우 받는 복싱 기구는 4대 메이저 기구인 WBA, WBA, IBF, WBO 이라고 할수 있다. 복싱에서 메이저 기구, 타이틀이라함은 대중들로 부터 챔피언에 대한 명예와 대전료의 액수가 그 기준이 될 것이다.  즉, 메이저 기구의 챔피언들은 세계 복싱 관계자들과 대중들로부터 공인을 받는 것이고 그에 따른 몸값이 다르기 때문이다.

현재 세계 복싱계는 수십개의 국제적인 복싱 기구가 존재 한다. 저마다 자신들의 기구 챔피언을 월드 챔피언이라고 발표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대중들과 복싱 관계자들의 공인(공감대,여론,흥행규모,대전료,관심도 등)이 뒤따라 주어야 명실공히 메이저 타이틀로 인정을 받을수 있다. 선수들은 메이저 기구의 챔피언이 되어야만 자신들의 몸값을 제대로 받을수 있기 때문에 4대 기구 메이저 챔피언이 되기 위하여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것이다. 그러나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WBA, WBC 양대기구가 세계 복싱계를 양분하고 있었고 이 두 기구만이 명실상부한 세계 챔피언으로 대우 받는 시절이었다.

예전이나 오늘날이나 세계 최고의 복싱 시장은 미국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국제적인 복싱기구는 멕시코, 파나마, 베네주엘라 등의 중남미 국가가 주도를 하고 있었고 이러한 현상은 현재도 비슷한 양상이다.
세계적인 프로 복싱 흥행을 좌지우지 하는 미국의 복싱 관계자들은 바로 이러한 현상에 불만을 품고 있었고, 이러한 상황에 맞물려 드디어 미국 주도의 국제적인 복싱기구가 출현하게 된다.
바로 1983년 출범하게 되는 IBF(국제복싱연맹)가 그것이다.
미국의 로버트 리라는 인물이 주도하여 출범한 IBF는 본부를 미국에 두고, 세계 최고의 복싱 흥행을 주도하는 미국이 복싱 기구 또한 주도한다는 목표를 두고 의욕적으로 출범 하였지만, 복싱 기구 출범 초기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당시에는 마이너 기구라는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이는 WBC의 출범 초창기 모습과 위상과도 비슷하였는데, 사실 WBC 역시 WBA에서 분리하여 출범했던 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까지도 명실공히 메이저 기구로 대접받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는, 신생 복싱 기구가 거쳐야 하는 태생적인 한계와 전철이라고 할수 있다. 즉, 신생 복싱 기구가 복싱 관계자들이나 대중들로부터 명실공히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일정기간의 세월이 필요하며 한편, 그 기구 챔피언들의 실력과 위상, 대전료 등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할수 있을 것이다.

어찌됐든, 83년도에 출범한 IBF는 초창기의 WBC와 비슷하게 미국을 포함하여 아시아 몇개국의 참여 아래 각 체급별 챔피언들을 탄생 시키기 시작한다.
특히나, 미국 시장에서는 좀처럼 찾기 힘든 경량급은 대부분 아시아 시장에서 초대 챔피언 결정전을 치루게 되는데, 일본이 불참을 선언한 가운데, 당시 아시아 복싱 시장의 톱이었고, 전성기를 구가 하던 한국이 IBF 경량급 타이틀을 거의 독식하게 된다. 결국, 초창기 IBF가 국제적인 복싱 기구로써 자리 잡는데 있어 한국이 결정적인 역할을 해준 고마운 나라였던 것이다.
한편, IBF는 기구의 위상을 끌어 올리기 위하여 일부 중량급에서는 세계적인 복서들인 아론.프라이어, 마빈.헤글러 등에 대하여 결정전을 치루지 않고 그냥 챔피언으로 인정해 버리기도 한다.

이러한 상황속의 80년대 초반 한국 복싱은 그야말로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WBA, WBC 양대 기구 타이틀매치는 대중들의 엄청난 관심을 끌었고, 챔피언들의 위상과 대우는 당시 프로 스포츠중 최고를 달리고 있었다. 80년대 중반 당시 프로야구 톱이었던 선동열 선수의 연봉이 3천만원이었던 시절에 장정구, 유명우의 대전료는 이미 1억원을 넘고 있었고, 방송국에서 경기를 주최하는 프로모션에 지급하는 중계권료 또한 억단위를 넘어설 만큼 최고의 프로 스포츠는 단연 복싱이었다.
따라서 각 체급별 선수층은 매우 두터웠고, 특히나 경량급의 체급에서는 선수 인프라가 넘쳐나고 있었지만, 당시 양대 기구의 세계 타이틀에 도전하는것이 매우 어렵고 경쟁이 치열할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바로 이러한 상황과 맞물려 신생 기구인 IBF는 새로운 돌파구가 되었는데, 당시 KBC가 가입, 승인하면서 프로모터들은 각자 소속 선수들의 손쉬운 세계 타이틀매치를 활발하게 추진 하기에 이른다.
당시, 국내 경량급에는 상당히 많은 유망주들이 있었고, 이중에는 양대 기구 타이틀에 도전할만한 실력을 갖춘 선수들도 있었고, 그 정도의 레벨은 아니더라도 동양권을 넘어서는 레벨의 선수들이 다수 포진되어 있어, 어려운 양대 기구 세계 타이틀에 도전하고 싶어도 하지 못했던 선수들에게 기회를 줄수 있는 아주 적합한 돌파구가 된 것이 바로 당시 신생기구 IBF 타이틀매치였다.

이후, 30여년이 지난 오늘날 IBF는 명실공히 세계적인 메이저 기구의 위상으로 성장하였다. 특히나, 4대 메이저 기구중 유일하게 임트림 챔피언 제도를 시행하지 않고 있으며, 기타 랭킹 편성에서도 가장 공정하고 민주적으로 기구를 운영 하면서 오늘날 복싱 기구의 폐해중에 하나인 소위 벨트 장사를 하지 않는 유일한 기구로써 세계 복싱 관계자들, 대중들로부터 인정 받고 있는 세계적인 복싱 기구로 성장 한 것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초창기 IBF에 엄청난 기여를 하였던 한국은 복싱 침체로 인하여 현재 체급별 랭킹에 들어갈수 있는 선수들 조차 없는 초라한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IBF는 한국 복싱계에 있어 명과암이 극명하게 나타났었던 애증의 복싱 기구라고 할수 있으며 80년대 중,후반 국내 복싱계에 실로 엄청난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80년대 초반 당시 한국 복싱 시장에서는 명실상부한 양대 기구 타이틀중 WBC의 장정구 챔피언 탄생후 드디어 신생기구 IBF의 챔피언들이 탄생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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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도는 1981년 5월 8일 만17세의 어린 나이에 프로에 데뷔한다.
데뷔 이후 단 2개월만에 4전을 치루었고, 1승1패2무라는 초라한 성적표를 기록하지만, 이후 83년 6월 한국타이틀을 획득할 때 까지 9승1무를 기록하며 더 이상 패배를 기록하지 않으며 경쟁이 치열했던 당시 경량급에서 조용히 실력을 쌓아 간다.

예쁘장한 마스크와 투지 넘치는 파이팅으로 팬들의 눈을 사로 잡았던 그는 정상에 오르기 전까지 곧잘 하는 유망주로만 알려졌는데, 정희연을 격파한 후, 기량이 급성장하였고 결국 세계 챔피언에 오르게 된다.
치열했던 국내 경량급에서 강자들과 글러브를 맞대며 성장한 끈기있는 파이터로 챔피언 시절에 보여주었던 놀라운 파이팅은 상대를 가리지 않은 초년병 시절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복싱 관계자들에게 공통적으로 들을수 있는 말중의 하나가 “세계 챔피언은 실력도 갖추어야 하지만 천운이 따라야 한다” 라고 한다. 바로 이 “천운”이 따라주어 챔피언에 등극한 행운아중의 한 선수가 바로 전주도이다. 당시 국내 최고의 프로모션인 극동 소속이었던 전주도는 한국 챔피언 등극후 실력이 급성장 하면서 활발하게 경기를 갖으며 2차 방어를 마치고 한단계 레벨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같은 체급 극동의 간판은 타이틀을 잃고 재기를 모색하던 김철호였다.
김철호 역시 한창 나이였고, 전 챔피언으로써 흥행이 보증되는 선수였기 때문에 극동의 전호연 프로모터는 김철호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기 위하여 활로를 모색 하였지만, 양대 기구의 챔피언은 막강 하였고, 비즈니스 또한 여의치가 않은 상황이었다. 바로 이즈음, IBF가 출범 하였고 이와 같은 상황에 맞물려 극동은 김철호의 타이틀 방향을 IBF로 수정하고 제기전을 주지만, 태국의 프라운삭.무앙스린 선수에게 의외의 패배를 당하면서 전호연 프로모터를 고민에 빠지게 한다.
이때, 김철호의 대타로 기용된 사나이가 같은 체급에서 조용히 칼을 갈고 있었던 한국 챔피언 전주도였다. 몇 년전 김철호 자신이 이승훈의 대타로 나가 일거에 세계 챔피언에 등극했듯이 운명의 신은 또다시 전주도에게 기회를 준 것이다.

IBF를 인정 하지 않고 있던 일본은 JBC를 이탈한 일부 복싱 관계자들에 의하여 Jr.밴텀급 초대 챔피언 결정전을 일본에 유치하며 내세운 선수가 가스가이.겐 선수였다. 1983년 12월 10일 일본 오사카에서 벌어진 이 경기에서 김철호의 대타로 나선 전주도는 발군의 실력을 선보이며 적지에서 5R KO로 통쾌한 승리를 거두고 비록 당시 마이너 기구이긴 하지만 대망의 세계 챔피언 자리에 오르며 자신의 레벨을 일거에 격상 시킨다.

전주도는 IBF 챔피언임에도 불구하고 팬들로부터 WBC, WBA 챔피언 못지 않게 높은 선호도를 보이고 있는 인물이다. 챔피언에 오른 전주도는 이후 5연속 KO방어를 기록하며 당시 팬들로부터 상당히 높은 인기를 자랑하기도 했다.

동문의 선배 김철호의 복수전이자 12월의 혹한을 녹였던 프라운삭.무앙수린과의 1차 방어전은 오랫동안 기억하고 싶은 난타전이었으며 당시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했던 IBF 챔피언의 이미지를 격상 시켰던 박광구와의 5차 방어전 “울산 대회전”은 한국 복싱 역사에서 길이 남을 명승부로 손색이 없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비록 85년 5월 인도네시아 원정으로 치루어진 6차 방어전에서 자국의 영웅이었던 엘리.피칼에게 무기력한 패배를 당하면서 벨트를 풀고 말았지만, 그의 화려했던 챔피언 시절의 기억은 이를 상쇄하고도 남음이 있다.

관중들을 열광케 하는 투지 만점의 한국형 탱크 전주도는 초창기 IBF 챔피언의 위상을 끌어 올렸던 공로자이다.



PS. 전주도 챔피언은 은퇴 이후 개인사업에 매진 하면서 간간히 복싱계에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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